목적지 : 발리 덴빠샤군 굽타동 스미냑마을 내의 엘루이 풀빌라( 블리블리)
일정 : 월 오전 출발 금 오전 도착
현지 : 안내인 까랑(40세, 흰두교인, 모건프리먼 닮음, 친절함.)
수행기사 : 아궁(한국말이 안통해서 잘모르겠음)

출발 당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의 표정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오전 10시30분 출발 가루다 항공기가 자카르타 홍수로 인해 오후 4시 30분으로 변경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주말 내내 바뻐서 여행준비를 못했던 마누라였다. 내가 자는 동안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짐 싸느라 고생했던 마누라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지더니 예쁜 입에서 동물에 왕국에서 보았던 으르렁 거림이 흘러나왔다. 천재지변이었으니 망정이지 남편지변이었으면 분명 물어 뜯겼을 것이다.

긴 한 숨과 함께 여행가방을 먼저 부친 우리는 가루다 항공에서 준비한 인천공항 근처의 모 호텔(말은 호텔이지만 모텔수준)로 배송되었다. 모텔서 아침을 먹고 객실로 올라가 대충 주무시다가 다시 점심을 꾸역꾸역 채워 넣고 공항으로 출발. 모텔 지하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때운 식사는 한마디로 군바리 식사수준 정도...

밤 12시 경 발리에 도착한 우리는 또 한번의 짜증을 맞이하게 되었다. 7시간 동안의 여행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한술 더 떠서 입국심사를 하느라고 40분 정도 줄을 서게 되었던 것이다. 발리의 입국심사가 항상 이렇게 긴가? 시간이 흐를수록 각국에서 몰려온 온갖 인간군상들의 한숨이 중국어를 선두로 난잡스런 날파리처럼 공항 내를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수속을 마치고는 공항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 이름을 명기한 푯말을 한 순간에 찾아낸 마누라의 으스대는 자뻑성 감탄사를 귓전으로 흘리며 현지 안내인(까랑)을 따라 나섰다.

한국 여행사 직원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비행시간 변경과 피곤함에 대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 힘드셨지요? 한숨은 그만 쉬시고 안내인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왠지 모르게 ”야, 힘든건 알겠는데 우리 책임 아니거든. 그러니 더 이상 불만을 내비치지 마라”라는 경고성 멘트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짜증나서 조금 더 투정 부리고 위로 받고 싶었는데 쬐금 섭섭했다.

새벽에 도착한 엘루이. 맨 끝에 위치한 14번 빌라 키를 받았다. 문을 열고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환히 밝힌 조명 속에 빌라의 예쁜 내부가 보였다. 빌라의 구성은 응접실과 연못, 침실과 욕실이 전체 넓이의 반 정도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풀장과 정원으로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었다. 사방 테두리를 따라 열대수와 화초가 그럴듯하게 구성되어있어서 보기에 아담하면서도 깨끗한 것이 무척 좋았다.

특히 정원에 실외 풀이 있다는 것, 주위에 고층 건물이 없어서 나체로(나만) 수영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스케줄이 없는 마지막 날엔 각종 체형의 다이빙을 원없이 할수 있었다.

풀의 규모가 대략 가로 2.5미터 세로 6,7미터로 아담하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전기적 장치로 풀 내부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한쪽 면으로 항상 흘러 넘치게 되어있는 점이 좋았다.

한국에서 반드시 요런 집을 짓고 살리라. 겨울엔 추우니까 실외 풀장은 안되겠고, 실내에 풀장을 설치한 다음 지붕은 풀장 위쪽만 다른 곳보다 좀 높게 이중 강화유리로 만들고 풀옆엔 동굴 컨셉의 환상적인 홈빠를 설치한 다음...-_-

난 짐을 풀기도 전에 마누라에게 “넌, 짐 정리해!”라는 어명을 내리고는 대역죄가 벌어지기 전에 곧장 풀장으로 뛰어 들었다. 온갖 아름다운 것이 다보였다. 하늘에는 별들이, 주위엔 열대수목이, 풀장 물안의 일렁이는 조명 속엔 황홀한 내 나신이.

물위에 누운 나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배형으로 유영하면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아, 이런게 인생이구나. 일상의 삶의 질이 이 정도는 되야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풀 안에서 와인잔을 들고 막 똥폼을 잡으려는데, 돌연 마누라의 찟어지는 듯한 경악성이 들렸다.

왕개구리가 점프하듯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오른 내 눈에 공포에 질린 마누라의 손끝이 가리킨 곳이 보였다. 이럴수가 침실 문 앞에 이곳 토박이인 듯한 놈이 알몸으로 누워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말이나 되는 시츄에이션인가? 그것도 침실 문 앞에?

놈에게 상황을 물어볼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달려온 가속도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점프하면서 주춤거리며 당황하는 놈의 몸통에다 통렬한 발차기를 날렸다.

설마 이 야밤에 빌라손님이 입실 할 줄은 예상치도 못했는지 놈은 자다가 일어난 표정으로 나의 공격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누가 보더라도 피할 수가 없는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한데 웬걸, 순간적으로 허리를 튼 놈은 후다닥 일어나더니 기이한 몸짓으로 나의 공격을 흘리면서 번개처럼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기괴한 몸동작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대체 왜 저놈이 이곳에 있는 건지? 다시는 이곳에 침입하지 않는 건지?” 나는 놈을 제압한 다음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마누라도 옆에서 두 손을 꽉 잡고는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며 미친듯한 경호성을 꺅꺅! 연발해댔다. 한데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재빠르던 놈이 도망치다 연못에 빠지고는 갑자기 속도가 굼벵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손발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데 속도는 슬로우 비디오였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도망치던 놈이 물에서는 느려터지게 움직이다니, 죽을 듯이 버둥거리는 새끼 손가락만한 도마뱀(^^;)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다.

마누라는 좀 전에 그렇게나 무서워 했던 것도 잊었는지 자기보다 전투력 상위레벨의 도마뱀님을 제 주제도 모르고 깔깔거리며 비웃어 댔다. 귀여운 것 같은니라고...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빌라 내부가 울창한 관계로 곤충이나 파충류들이 간혹 환영 인사차 놀러오지만,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지키자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지침 때문에 침실근처에는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것. 예의를 못 배워 처먹어 안하무충인 놈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도마뱀의 무식함을 비웃던 내가 그날밤 도마뱀 꼴이 났다. 침대 기둥 주위에 늘어진 망사 커턴이 장식만이 아닌 모기장의 기능도 있었던 것인데, 못 배운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누웠다가. 모기들에게 수차례 여행빵을 당했던 것이다.

골아 떨어 진채 아무 반항도 하지 않는 마누라는 물지 않고 왜 나만 무는 것일까? 지들이 유호성 모기인가? 한 놈만 죽어라고 물게? XX끼들!

다음날 아침, 마누라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난 나는 눈꼽을 후벼파며 빌라 안에서의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메뉴는 일정 내내 아메리카식과 발리식 딱 2종류만 있다. 발리식은 볶은밥에 후라이 하나 올려 놓은 것에 주스 한잔 그리고 과일 디저트.

아메리카식은 토스트 기계에 구운 식빵과 얇은 고기 몇장(이게 이름이 디게 쉬운건데 난 잘모르겠다-베이컨이란다.) 그리고 주스와 과일 디저트..... 참고로 발리의 쌀은 소위 알랑미라는 것으로 일년에 3번 추수를 하기에 맥아리가 없다.

마치 소주 한잔에 물 두 잔을 타서 희석한것 처럼 맹숭맹숭한 맛이다. 아침 식사 때마다 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이곳 상점들에서도 한국 컵라면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김치는 구할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후 래프팅 장소까지 차량 이동시간은 2시간 정도 걸렸다. 놀라운 것은 발리의 모든 차들이 차선 변경시 깜박이를 거의 켜지 않는 다는 것과 운행 중 차량간 거리를 바짝 붙이고 운전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고율이 적다는 까랑의 말이었지만, 위급상황시 발리의 흰두신들이 순간이동이라도 시켜준다는 말인가?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았다.

래프팅 장소에 갔더니 동서양의 수많은 사람들이 끼리기리 모여 즐거운 표정으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보트에 탈 때 흙탕물을 건너야 했다. 물에 젖는 것이 갑자기 싫어졌다. 마누라보고 좀만 업고 가라고 했다.

사실 마누라와 나는 심하게 나이 차이가 나기에 정기적으로 어른을 모시는 정신교육을 실시하는 편이다. 교육상 꼭 필요한 것 같다. 당연히 마누라도 십분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정신교육에 임하고 있다.

갸녀린 등판에 나를 업은 마누라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한발 한발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이동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발을 떼는 가련한 그 모습에 뒤에서 영어로 모라모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욕같았다.

나는 할 수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금만 더 가면된다고, 넌 할 수 있다고 자상하게 위로해 주었다.

래프팅은 보트잡이 현지인 한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한국인 한 쌍과 같이 탔는데, 평소 겁이 많은 마누라지만 고무보트가 격랑을 지날 때나 측면의 바위에 부딛칠때마다 아주 살판 났다는듯이 삐약삐약거리면서 좋아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너무 무섭지도 않고 딱 정당한 정도의 스릴을 느꼈나 보다. 난 나중에는 좀 지루했으나 보너스에 탓에 나름 의의가 있는 래프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너스란 다름 아닌. 팬티차림과 나체로 물가에서 목욕을 하는 여인들이 간혹 보였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보트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데도 “넌 지나가라, 난 벗고 목욕 할란다”라며 우리들이 마치 동네 개라도 된다는 듯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내, 이 동네에서는 개도 보트를 타고 래프팅을 하나?

목욕하는 아주머니들 가운데서도 간혹 늘씬한 동체의 젊은 처자들도 눈에 띄였